일상과 고용, 우리 삶의 ‘장애인’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작성일 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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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부문 대상 이음미 「빙산의 일각」 이 글은 그와 내가 만난 22년의 인생 기록이자, 사람이 사람을 만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설레는 감정에는 나이도 국경도 불편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내 경험이기도 하다. “왜? 왜 그런 남자랑 사귀려고 해?” “너 그러다 후회한다. 잘 걷지도 못한다며?” 카페가 쩌렁쩌렁 울렸다. 창피해서 두리번거렸다. 이 격렬한 반응은 뭐지? 언제는 남자 좀 만나라고 난리더니 이제 만나겠다고 하니까 왜 이러지? 게다가 ‘그런 남자’라니, ‘후회한다’라니, 왜 그를 만나 보지도 않고 이러는지 짜증났다. 여느 때처럼 떡진 머리에 칫솔 물고 사무실을 나서다 권과 딱 마주쳤다. 하마터면 칫솔을 떨어트릴 뻔했다. 새로 꾸려질 팀에 훈남이 있다더니, 젠장! 이런 몰골로 소문을 확인 하다니. 꿈꾸던 남자가 강림했다. 큰 키에 적당히 마른 몸매, 얼굴은 말해 무엇 하리. 길게 인디언 보조개를 드러낸 그가 미소 짓고 있다. 아, 비웃는 걸지도. 애니메이션 칼라 수작업 4년 경력은 다크 서클을 발톱까지 끌어 내렸다. 발랄은 모르겠고 상큼은 시큼이 된지 오래다. 꿈에 그리던 남자는 그림에만 있으니 눈만 높아졌다. 그의 팀을 기웃댔다. 언니들은 배신이야 배신이라면서도 잘해보라고 등 떠밀었다. 팀을 옮겼다. 새벽 출근해서 그의 책상을 정리하고 마실 거리를 올려놓는 일이 거듭되자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 쳤다. 그는 부담스럽다며 다가서는 날 자꾸 밀어 냈다. 이제 막 발을 뗀 아이처럼 불안하게 뒤뚱 거리는 걸음걸이와 불편한 손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키보드와 타블렛을 넘나들며 작업하는 손은 나보다 훨씬 빠르고 우아했다.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상관없었을지도. 그는 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다고 했다. 마트에서 카트 끌며 아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전국의 맛집 순회 같은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일들. 한데 서른이 넘으면 결혼을 하지 못할 거라며 알 수 없는 조급증을 냈다. 봉사동아리 세 곳에 열심이었다. 그 중 한 곳에서 자신을 잘 이해해 줄 것 같다는 여자와 썸을 탄다고 들떠했다. 그게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다치기 전 그는 체육교사를 꿈꿨다. 운동 중 사고로 목이 부러졌다. 모든 게 산산조각 났고 1년 넘게 생사를 넘나들었다.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나락에서 허우적대다 퇴원 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그것도 4층을 오르내리는 건 말 그대로 똥 쌀만큼 힘들었다. 모든 게 단절됐다. 어느 날, 친구에게 끌려 간 또래 모임이 1년 간 지속 됐다. 그동안 예전의 자신감과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되찾았고 여동생 같던 숙이 다가왔다. 그는 동정도 연민도 갖지 말라며 세차게 밀어 냈다. 다시 집 안에 틀어 박혀, 모임도 나가지 않았다. 계단 하나 오르내리는 것도 사력을 다해야 하는 남자친구라니, 모임 사람들은 대단하다며 숙을 응원했다. 결국 한쪽은 행복하다 하고 한쪽은 초조해져 가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바뀔 때쯤 숙은 부모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는 말을 친구에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헤어지지는 통보도 통곡도 없었다. 두 번의 이별은 큰 충격이었다. 몸이 불편해도 살아야 했다. 컴퓨터 학원을 등록했다. 뻣뻣한 몸으로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빼먹지 않으려 애쓰며 정보처리와 캐드 자격증을 취득했다. 수백 장의 이력서를 뿌렸지만 자격증이 있다고 장애인을 받아주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PC통신망 게시판에 이력을 올렸다. 뭐든 열심히 하겠다는 말이 통했는지 천안의 한 설계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연봉도 당시로선 꽤 높았다. 기숙사 생활이 부담됐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곳, 양재동에 있는 애니메이션 회사라며 면접을 보자 했다. 복도 양쪽으로 걸린 만화영화 포스터를 보자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부터 애니메이션을 배우며 동시에 파묻혀 살았다.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그의 엄마는 장애인 노동착취 아니냐며 화를 냈지만 그는 행복했다. 첫 직장이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의 장애를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도 못했다. 유토피아 같던 회사가 월급이 밀리더니 망했다. 그렇게 그는 내가 있는 회사로 왔다. 우린 처음 만난 그 시간, 나는 칫솔을 물고 있다. 그와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었다. 엄마의 반대가 있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다만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을 훈남에 성격 좋은 남자가 들어왔다고 조잘댔다.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엄마가 몸이 좀 불편하다고 하자 빤히 쳐다봤다. 정적, 이내 계단 있는 2층 집인데 괜찮겠냐고, 상관없으면 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엄마를 껴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잊었던 썸녀가 온 신경을 긁었다. 아직 고백 하지 않은 눈치, 짝꿍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를 좋아하는데 썸타는 여자에 빠져 있어 속상하다며 징징댔다. 언니는 불편한 몸 때문에 몇 번 차이더니 봉사자에 집착하는 거라며, 섬세하고 자상한 사람이라며 자기가 도울 테니 잘해 보라고 했다. 그가 시간 있냐고 했다. 미사리의 조용한 카페. 8월의 뜨거운 태양이 스러지며 남긴 멋진 노을이 넓은 창을 가득 채웠다. 숨이 멎을 만큼 예쁜 창가에 앉았다. 마침 그가 시도 때도 없이 웅얼거리던, 너 가는 길마다 함께 다니며 너의 길을 비추겠다는 김광석의 노래가 흘렀다. 나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는 그를 보자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났다. 노을 때문인지 노래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가 함께여서인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그랬으면 싶었다. 음료가 나오고도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그가 결심한 듯, 왜 자기한테 관심을 갖느냐고 물었다. 이 나이에 연애만 할 것도 아니고 결혼을 전제로 만나야 하는데, 그래도 사귈 거냐며 체념한 듯 고개 숙였다. “네, 우리 사귀어요.” 이미 결정했다. 망설이지 않았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렇게 쉽게 대답할 게 아니라며, 잘 생각해보라며 더듬더듬 되레 나를 설득했다. 부모님은 아느냐 길래, 몸 불편한 건 다 알고 허락도 했다고 말하자 그의 동그란 눈이 글썽였다. “더 할 말 없어요? 그럼 이제 우리 사귀는 거예요?” 그는 숙인 고개와 어깨를 같이 끄덕였다. 행복했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손깍지를 끼고 츄러스를 나눠먹으며 놀이공원을 누비고 싶었는데 이제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는 사람 많은 곳은 위험하다 했고, 나는 떼를 썼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만나자 마자 손깍지를 꼈다. 또 눈이 동그래졌다. 전에 만난 사람들은 사람 많은 데서는 잡은 손도 놓았다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화장실 갈 때도 놓지 않을 테니 각오하라며 웃었다. 그의 손을 잡는다는 건 사람들의 힐끔거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장애인 남자와 비장애인 여자, 그 반대라도 손깍지를 끼면 색안경을 끼는 사람들은 널렸다. 남자가 돈이 많다거나 여자가 문제가 있을 거라는 말들과 무례한 눈빛들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2년 연애, 결혼하고 24년 째 아주 잘 살고 있다. 그의 바람대로 서른을 넘기지 않았지만 언니 말처럼 세심하지도 자상하지도 않았다. 가부장적이고 무심하기까지 해서 도깨비도 아닌 이상 함께 한 날들이 모두 좋았을 리 없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행복하다. 두 아이를 낳고 그 애들이 성인이 되기까지 기꺼이 세월을 정통으로 함께 맞았다. 흰머리와 볼록한 배, 얇아진 엉덩이를 서로 다독인다. 기념일을 평일처럼 무심히 지나치는 간 큰 남편이지만 정년까지 버텨보겠다며 애쓰는 그를 존경한다. 남편은 이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지만 여전히 처음 만났던, 후광이 비치던 그때와 다르지 않다. 운동선수이던 그의 인생은 다치면서 분명 달라졌겠지만 여전히 사람 좋아하고 놀기 좋아한다.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남편을 아무리 생각해도 지체장애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다. 그저 빙산의 일각이다. 그리고 그의 불편함이 나는 아무렇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장애인이었던 우리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고. 사람들이 장애인과 다정한 이웃으로 살 수 있다면 편견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동네에서 남편과 손깍지를 끼고 다녀도 힐끔 거리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 여느 부부들이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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